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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수사 이억기 (32)




 전붕이 장흥부사가 되었다. 장흥은 현이 4개나 있을 정도로 대읍이다. 장택현, 수령현, 탐진현,회령현이나 지금까지 이름이 전해져 오는 것은 회령현의 회령포가 있을 뿐이다. 대대로 격포진과 회령포에서 전선을 만들어 왔다.양식은 법성창과 성당포에 기댈만하다.


 * 저술편집담당; GOLDSMITH

* 이메일: krolp@naver.com 

[소설]수사 이억기(31) 가리포 사람들


 가리포는 가시나무가 많이 자란다. 이 억기는 천자총통에 사용되는 '대장군전'을 가리포 공방에서 만들기로 했다. 조선시대에는 실명제가 광범위하게 시행 정착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몸통 길이는 182㎝이며, 최대 지름 9.4㎝, 무게 10.6㎏이다.  철촉이 보통 10㎝ 내외인 점을 고려하면, 전체 길이는 192㎝ 정도이면 될 것이다. .

몸통 중간에는 '가리포 상 김등 조'(加里浦 上 金等 造)식으로  해서체로 실명을 적어 놓아야 뒤탈이 있을 때 바로잡을 수가 있을 것이다.  가리포는 전남 완도에 설치됐던 수군 첨절제사진(僉節制使鎭)이 있던 장소로, 이곳의 장인인 김씨 등이 만들어 진상한 것으로 보인다.


 남해안의 유명 유적지마다  이순신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것은 옳다 할수 없다.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170723033300005?input=1195m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22601&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소설]수사 이억기(30) 소가포에 배를 숨기다



진도(珍島)의 서면(西面) 소가포(蘇可浦)에 수영(水營)의 병선 3,4척을 매달 윤번으로 세워 정박하고

강진(康津)고금도(古今島)에 훈국(訓局)의 둔전이 있는데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면 격군들의 양식은 될 것이오


 이억기가 목포 만호에게 일러 군량을 대게 했다.

사변이 일거든 소가포(所可浦) 선군 71명과 사월곶이[沙月串] 선군 90명을 목포 만호가 주관하게 해야 할 것이오. 


저술편집:goldsmith

이메일: krolp@naver.com

[소설]수사 이억기(29) 목포만호부

목포 만호진이 설치된 것은 조선 세종21년 1439년이다. 임진란 때에는 목포 고하도에 이순신장군이 친히 수군진을 설치하여 108일 동안 머물렀다.




1897년 10월 1일 목포항이 개항 되면서 점차 기능을 상실하다 1910년 10월 1일「목포부」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목포 목포만호목포지역은 예부터 내륙과 해상을 연결하는 군사상의 요충지였는데,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으로 목포영, 목포대라고 부른다.


 조선 왕조 때 각 도의 여러 진에 붙은 종 4품의 무관인 만호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 만호진, 만호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러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조선 세종 15년(1433)에 목포병선을 황원(현재 해남)으로 옮기고, 세종 21년(1439)에 현재의 자리에 목포 만호진을 설치하였으며, 개항과 함께 고종 21년(1895)에 폐진된 것으로 보인다.

일찌기 중종 치세에 안윤덕이 " 만일 목포(木浦) 이상을 넘어서게 된다면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니, 마땅히 제도(諸島)를 수색 토벌하여 머물러 있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한 적이 있어니 목포는 수로의 목과 같다.

저술편집책임: goldsmith

이메일: krolp@naver.com



[소설] 수사 이억기(28) - 해선



  중국의 해선(海船)은 목재가 좋지 못하여 바다에서 운행하기가 불편하니 그대 나라의 선척으로 금주위(金州衛)에 와서 실어가도록 하라. 그러면 내가 전은(錢銀)을 지급하고 사람을 고용하여 매달 수송하겠다.’ 하였는데, 그 뜻이 진실로 범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 의주(義州)에서 금주까지의 수로(水路)에 대한 험이(險易)를 본국의 초공(梢工)) 들은 익힌 적이 없으니, 이제 도사 앞으로 한 통의 자문(咨文)) 을 보내어 ‘본국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군량을 수송하는 것은 실로 곤란한 바이다.



유희선은 장흥부사를 관고를 넉넉하게 하여 전비를 갖추었다.

전 강진현감 유돈이 섬사람을 이끌고  고기를 잡아 왔다. 해남 변응정이 우수영에 왔다.

장성 현감 이귀는 유생(儒生)으로서 도임한 지 오래지 않았는데도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제조하는 등 조처가 제대로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즐겨 따른다고 합니다. 모든 일은 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지 진실로 하기만 한다면 반드시 이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귀의 일은 매우 가상한 것이니 상을 논하여 포장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권면시켜야 될 것 같습니다.



도내의 여러 고을에도 이런 내용으로 신명(申明)하여 계칙(戒飭), 모두 이귀가 한 것처럼 각기 본읍의 군사를 초발하여 성심껏 훈련시키되, 조총을 가르치기도 하고 궁시를 익히게 하기도 하여 조처에 방도가 있게 되면 백성이 수고롭지 않고도 일이 제대로 될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전라도 관찰사에게 하유하여 예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검모포에 목장이 있어 말을 길러 조련했다. 이억기는 마의의 기질이 있으므로 수시로 진료하였다.

[소설] 수사 이억기(27) 갑옷을 만들라

벽단(碧團) 이하 여러 진에서 지금 새로 조선(漕船)을 만드니 나누어 정박하게 할 수 있겠으나 다만 이 배는 선체(船體)가 작아서 군사를 싣는 데 합당하지 않을까 하옵니다.


벽단 이상의 여러 진에는 황해도로 하여금 배 만드는 공장(工匠) 10명을 뽑아 강계(江界)·벽동(碧潼)으로 나누어 보내서 별다른 양식으로 제작하게 해서 강계독로강(禿魯江)을 경유하고 벽동통건강(通巾江)을 경유하여 강물에 띄워 내려 보내서 나누어 주게 함이 어떨까 하옵니다.


엄심(掩心)을 입은 자가 있으므로 데려다 물어 보니 그가 말하기를 ‘종이를 소금물에 담갔다가 햇볕에 말리어 가지고 베와 실로 섞어 꿰매며 또 검은 무명으로 밖을 싸고 흰 베로 안을 받치는데 사이 사이에 종이 노끈을 뚫어 맺기를 못대가리같이 하므로 화살이 잘 들어오지 않고 활을 쏘기에도 편리하며 겸하여 적을 막을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공력도 갑옷 만드는 것처럼 어렵지 않다.


무장현감 현덕량이 벽단선을 이끌고 이억기 수군에 합류했다.

가가려가 군사들이 입은 갑옷은 모두 해지고 헐렁하여 쓸모가 없으므로 모름지기 엄심갑(掩心甲)이라야 수전에서 편안할 것이라 하여 갖고 왔다.

 이빈이 향화인을 훈육했다.


사고소우(沙古所于) 등 15명은 작년 봄부터 이빈(李薲)의 진중(陣中)에 있으면서 길들인 지 이미 오래고 성품이 공순하여 모두 이(李) 씨로 성(姓)을 삼았는데, 이는 이빈의 성을 따른 것입니다. 포를 쏘는 것이나 화약을 만드는 것에 익숙치 않은 것이 없다 하니,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하고 훈련 도감에 배속시켜 각자 그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고, 연로고(延老古) 등 6명은 평안도로, 산여문(山汝文) 등 7명은 함경도로 나누어 보내는 것이 마땅할 것 같아 감히 아룁니다.


[소설] 수사 이억기(26) 완도 가리포 조선소

여몽의 동정연합군이 제1차 일본침공을 하였을 때
약 3만 명의 연합군을 수송한 전함 9백여 척을 부안의 변산에서 건조하였다는 고려사의 기
록을 중심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여몽 연합군의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른다. 고려사의 충렬왕 즉위년 10월 초와 김방
경전에는 몽고군이 2만5천여 명에 고려군이 8천명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일본인 이케우찌의
심도 있는 연구서에 의하면 몽고군 2만 명에 고려군이 5천3백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사
제27권 원종(元宗 15년, 1274년)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갑술 15년 봄 정월에 원나라 총관 찰홀을 보내어 전함 3백 척의 조선을 감독하고
그 공장과 일꾼, 일체의 물건을 오로지 본국(고려)에 맡겨 부담케 하거늘 이에 문하시중 김
방경으로 동남도의 도독사를 삼았다]

원나라가 또 소용대장군 홍다구로 감독 조선관군민총관을 삼으니 다구가 정월 15일
로써 역사(役事) 일으키기를 약속하고 재촉이 심히 엄하거늘 왕이 추밀원부사 허공으로 전
주도지휘사를 삼고, 우복야 홍록주로 전라도 지휘사로 삼고, 또 대장군 나유를 전라도에, 김
백균을 경상도에, 박보를 동계에, 국자가업반부를 서해도에, 장군 임계를 교주도에 보내어
각각 부부사를 삼아 공장, 역도, 3만5백명을 징집하여 조선소에 나아가게 하니 때에 역기가
낙택하고 서무가 번극하여 기한이 급박하매 빠르기가 뇌전과 같으니 백성이 심히 괴로워하
였다.

이 고려사 기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제1차 일본정벌을 위한 준비로 수송 전함선의
건조를 전주도의 부안(당시는 보안현) 변산과 나주도의 천관산 등에 설치하도록 하고 그 감
독 책임자를 임명한 내용과 배를 만드는 목수와 그에 따른 일꾼 3만5백 명을 동원한 규모를
밝히고 있다.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부안 검모포에서  배를 만들어왔다.


 이응표(李應彪)는 전일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로 있을 때 당시 수사였던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전투에 임하여 칠천량에서 싸웠다.  군량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배를 많이 건조했다고 한다.
가리포는 장보고가 대사로 있던 청해진 인근에 있다.


가리포진지도를 보면 동, 서, 북문은 있는데 남문은 그려져 있지 않다.

그림에는 없으나 남문은 폐문루(閉門樓)라 하였으며, 동문은 영일루(迎日樓), 서문은 망미루(望美樓)가 있었고 성서(城西)의 성은단(城隱壇)이 있었다. 그리고 북문은 첨극루(瞻極樓)라고 하였으며 가장 높은 봉우리인 망왜대(望倭臺)가 있어 여기에 오르면 주변의 해로와 배들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1928년 7월 31일과 8월 1일 2회에 걸쳐서 도서순례기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성내에는 청백당(靑白堂), 책실(冊室), 향사당(鄕社堂), 군관청(軍官廳), 연청(椽廳)과 추청(秋廳), 장방청(長房廳), 관로청(官奴廳), 사령청(使令廳), 습사소(習射所) 등이 이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첨극루의 첨자가 처다 볼 또는 볼 첨(瞻)자이다. 아마도 각 망산의 봉수대에 연결하여 상황을 알리는 곳이라 이런 글자를 썼을 것으로 본다. 건물들과 같이 지금 내천꼬랑이라고 부르는 곳의 선소와 소가용리에 선소가 있었지만, 원형복원이야 어렵겠지만 표시라도 했으면 한다.



선소가 있었던 것은 이곳 완도에는 배를 만드는데 사용하였던 황장목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1460년에 조전선(漕戰船) 100척을 만드는데 여러 고을에서 선장(船匠) 100명, 목장(木匠) 200명을 뽑아서 변산과 완도에 보내라는 기록이 있다.(세조6년(1460) 7월1일)



1476년에는 배 만드는 변산의 소나무가 이미 다 없어져서 완도로 자리를(배 만드는 장소) 옮겼다니 완도가 다 떨어지면(배 만드는 소나무가 다 없어지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왕이 걱정했던 기록으로 보아(성종5년(1474)10월28일) 완도에서 배를 만든 일들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완도에는 그만큼 소나무와 배를 만드는 목수들이 많았었음을 알 수가 있다.



1505년에는 전라도에서 보낸 잉박선(芿朴船, 너벅선, 廣舟) 19척, 토선(吐船) 12척, 착어선(捉漁船) 2척을 내수사에 소속시키라고(연산군 11년(1505)8월15일) 했던 것으로 보아 나룻배나 어선까지도 완도에서 만들어 내수사로 보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완도에는 대규묘의 조선소가 있었을 것이고, 선장(船匠)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소설] 수사 이억기(25) 곰소에서 판옥선을 건조하다




  1555년(명종 10) 군선을 새로 개발한 것이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구조와 기능이 혁신적으로 변모한 전투함이다. 종래의 군선에 비해 선체가 커서 노군의 수를 늘릴 수 있어 기동성이 좋아졌고, 2층으로 되어 있어 노군과 군사들이 방해하지 않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판옥선은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완승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즉 옥포해전·당포해전·한산해전·부산해전 등 주요 해전에 동원된 군선 중에서 3척의 거북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판옥선이었다.


그때 판옥선의 크기는 저판 길이 50~55척, 탑승인원 130명 정도로 파격적으로 컸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크기가 점점 커져 정조 때는 저판 길이 90척, 일반 판옥선이 저판 길이 70척 정도였고 탑승인원도 160명 내외로 늘었다.

임진난이 일어나기 전에 낙안 등지에서 판옥선이 대량으로 건조된 것을 알 수 있다.


선조 6년 (1573년)의 실록 기사이다.

'전라도 법성창(法聖倉)조선(漕船)을 부안(扶安)변산(邊山)에서 많이 만들었는데, 부안의 품관(品官) 등이 현감(縣監)에게 청하여 모자선(某字船)을 만들라는 체자(帖字)를 받았다'


선조 31년(1598년) 2월 22일의 실록기사이다.

'경리(經理)의 분부로 선박의 수를 나누어 정하였다. 평안도 철산(鐵山)에서 만들어야 할 배의 숫자는 20척인데 이미 완성된 배가 8척이니 더 만들어야 할 배가 12척이고, 황해도 장산곶(長山串)에서 만들어야 할 배의 숫자는 50척인데 이미 완성된 배가 40척이니 더 만들어야 할 배는 10척이며, 충청도 안민곶(安民串)에서 만들 배의 숫자는 10척인데 방금 일을 시작했다. 전라도 변산(邊山)에서 만들 배의 숫자는 20척인데 전일 속공선(屬公船) 13척을 그대로 더 수리했으므로 더 만들 것이 7척이다.

 이상은 모두 조선(漕船)에 관계된 것이고, 병선(兵船)에 대해서는 양호(兩湖)의 민력(民力)이 이미 고갈되었으므로 다시 더 만들도록 독촉할 수가 없었다. 주사(舟師)가 이미 40척을 만들었는데 이 숫자를 합하여 경리조선군무  양호에게 보고하였다.'

 이 당시 전라우수영의 수사는 이억기였으므로 변산에서 전선을 건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설] 수사 이억기 (24) 왜구와 장사하다


 
 이필은 가리포 첨사로, 선산도의 복병장으로 일했다. 가리포 첨사로 있으면서 왜구와 대전을 벌여 왼쪽 눈이 애꾸눈이 되었다.
선산도는 완도 인근  청산면에 있는  섬으로 청산도, 선원도라고도 한다.

진도의 달량성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한 곳이다. 원적이 힘겹게 싸우다가 사멸된 곳이다.

김빈(金贇)변협(邊協)이 모책을 함께하고 이희손(李希孫)도 일시에 진격하였더라면 포위를 풀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은 들어가 지원할 의사가 전연 없었고 이 홀로 진격하다가 패하여 돌아왔다.

김빈은 뒤에 변이 들어가 싸운다는 말을 듣고 승세(勝勢)라 여겨 군공(軍功)을 획득하려고 진군하였다가  기둑(旗纛)을 세운 전도(前導)가 평시처럼 가다가 마침내 복병(伏兵)에게 기습당하여 재용(才勇)이 있는 관군이 모두 살해되었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다. 


세조 3년(1457년)  전라도의 도절제사 영(都節制使營)을 지금 만약 나주(羅州)에 이치(移置)한다면 장흥(長興)·해남(海南) 등지에는 방수(防戍)가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지금 두 고을의 중앙인 강진현(康津縣)에 진(鎭)에 설치하여 군사 4백 명을 두고서 본현(本縣)  의 누락된 민호(民戶)로써 쇄정(刷定)하되, 만약 정원(定員)에 차지 않는다면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혁파된 가정군(加定軍) 내의 한량인(閑良人)으로써 충원하게 하였다.


 전라도 순천(順天)돌산포(突山浦)에는 동쪽에는 내례 석보(內禮石堡)가 있고, 서쪽에는 여수 석보(呂水石堡)가 있어 바다와의 상거가 동떨어지게 멀므로 방어가 긴요하지 않으니, 지금 돌산포를 혁파하고 그 선군(船軍)을 내례(內禮)여도(呂島)에 분속(分屬)시키게 하소서. 흥양(興陽)축두포(築頭浦)는 본진(本鎭)과 상거가 멀지 않으며, 동쪽에는 발포(鉢浦)가 있고 서쪽에는 녹도(鹿島)가 있어 포구(浦口)가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지금 축두포를 혁파하여 그 선군(船軍)을 발포녹도에 분속(分屬)시키게 하소서.




진도(珍島)금갑도(金甲島)의 남면(南面)은 동쪽에 가깝고, 남도포(南桃浦)의 남면(南面)은 서쪽에 가까와서 방어가 가장 긴요한데, 사월곶이[沙月串]는 동면(東面)이 북축배(北縮排)에 가깝고, 소가포(所可浦)는 서면(西面)이 북축배에 가까우니, 지금 사월곶이소가포를 혁파하고 그 선군(船軍)을 각기 본포(本浦)에 돌리게 하소서. 또 금갑도(金甲島)는 방어가 가장 긴요하고 군사의 수효도 또한 많으므로, 다만 권관(權管)만 두는 것은 적당하지 않으니, 마땅히 만호(萬戶)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왜구의 방비를 위해 도순찰사 박강이 남도의 해변을 개편했다.



 임진년에 왜변이 일어나고 나서 점차 대치하며 농성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왜구에게 물건을 내다파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선조28년91595년) 4월 26일의 기사를 살펴보자.


 "흉적이 바다에 머물고 있어 아직까지 한 하늘 밑에서 살고 있으니 상하 모두 남쪽을 바라보고 부심하고 있는데 진영을 마주하고 있는 곳에서는 점점 서로 친숙해져서 무찔러 없애는 일은 감히 바랄 수도 없고 이익이 있는 곳에는 서로 물건을 팔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경록은 경흥부사로 재임시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녹둔도의 방비를 소홀히 하였다가 기사회생하여 나주목사, 제주목사를 지냈다.

임난시에 고작 200여명의 군사로 왜변에 응하여 협찬하려고 하였으나 비변사는 응하지 않았다.


    "탄환같은 조그만 섬이 현재까지 다행히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아직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만일 적이 침범한다면 일개 섬의 힘만으로 잘 지킬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데 어떻게 주장(主將)으로서 진(鎭)을 떠나 바다를 건너 멀리 천리길을 올 수 있겠습니까. 경록이 품한 것은 그 충분(忠憤)은 가상하나 형편상 행하기 어렵습니다"



 선조 33년(1600년) 5월 3일 기사에 나오는 것으로 봐사  왜변의 화를 이경록이  잘 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설] 수사 이억기(23) 호치당총요



   호치당(胡致堂)은  당 태종을 조조(曹操)와 비교를 하면서 병법의 우열이 없음을 논했다. 호치당은 경사에도 띄어났지만
무술이나 병법서도 저작 하는 등 문무겸전의 사상가였다.

호치당총요는 병법의 백미로 역관 조지충이 이억기를 만나 전했다.


선조 30년(1597년)의 전투상황이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의 치보(馳報)에 ‘3월 8일 왜선(倭船) 대·중·소 3척이 거제(巨濟) 기문포(器問浦)에 와서 정박(定泊) 상륙(上陸)하였다.

 통제사(統制使)가 즉시 주사(舟師)를 거느리고서 일시에 발선(發船)하여 밤새도록 노를 저어 9일 이른 아침에 기문포에 당도하여 보니, 왜선 3척이 해안(海岸)에 매여 있는데 왜적은 모두 상륙하였고, 산기슭 사이에서 밥짓는 연기가 잠시 일어 나는 중에 왜적 3∼4명이 칼을 번뜩이며 언덕 위에 서 있었다.

 통제사가 항왜(降倭) 남여문(南汝文) 등을 보내어 이해(利害)로 회유(誨誘)하게 하였더니, 숨어 있던 왜적 20여 명이 나왔고, 남여문이 왜추(倭酋)와 조용히 담설(談說)하자 숨어 있던 왜적이 다 나왔는데 대개 80여 명이었으며 우리 주사(舟師)의 성대한 위용(威容)을 보고는 엄습을 받을까 의심하여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였다.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 우수(禹壽), 고성 현령(固城縣令) 조응도(趙凝道), 거제 현령 안위(安衛) 등이 탄 배가 다투어 올라가서 항복을 받으니, 장왜(將倭)가 그 무리 7명을 거느리고 와서 통제사의 배로 올라갔다.

전 가리포 첨사 이필이 향리에 있다 의병 수십명을 이끌고 이억기의 휘하에서 싸워 무공이 높았다.

[소설] 수사 이억기(22) 폭풍한설



     이억기는 나이 23세인 선조 16년(1583)2월, 경흥부사로 있으면서  여진족이 정예병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와 창고와 戎器를 약탈하였다.

이억기 부사는 騎步兵(기병과 보병 혼합부대)300명을 여진족으로  변장시켜서 그들의 진에 돌입해서 섞이게 했
다. 이윽고 여진족 추장 2명의 수급을 베어 장대에 달아 적들에에 보임으로써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전세가 단번에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이억기는 여진족에게 잡혀간 수백 명을 구해서 돌아왔다. 20대에 이미 개마 병법에 통달했던 것이다.


개마병법은 백두산을 깃점으로 하는 동이족 고유의 전법이다. 삭풍의 폭풍한설 속에서 여진족과 맞서 싸워야 했던 형인 이억복과 함께 수 백통의 간찰을 주고 받으며 전수를 했던 것이다. 

 수도 없이 여진족과의 공방전으로 향화인이 점차 늘어갔다. 개간을 해서 둔전으로 만들어 가는데 여진족들이 큰 역활을 했다.

노을가치(老乙可赤)는 서역의 여러나라로 부터  군량을 구해와 조선에 공급하고 군사 천 여명을 이끌고 왜적을 막아냈다.

[소설]수사 이억기 (21) 해남우수영가는 길



  군산에서 옥구를 거쳐 부안 검모포에 도착한 이 억기는 주변의 사또방백들을 불러 모았다. 검모포는 고려시대 군선을 만들던 곳이라 지세를 살펴보고 선창이 예전과 다름이 없는 지 살펴보기 위함이다.  

옥구, 부안,무장, 흥덕현의 방백들과 시사를 논하며 이리저리 양식이며 구휼이 잘 되고 있는지 풍속을 살피고 약방 의녀들이 창가를
부르며 시절을 보냈다.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변아중은 나주 고막원에 인근 사도방백들을 모일 모시에 달려오라고 기별을 넣어 두었다. 누구보다 변아중은 이 억기가 무엇을 살피는지 무엇을  좋아하는 지 머리 속에 넣어 두었다. 나주에서 남원, 정읍 수령들을 모아 점고를 하려는 것이었다. 



고막원 옆에는 백제시대부터 내려오는 복암사라는 절이 있다. 경흥부에 기녀로 있던 후조스님이 주지로 있다가 이억기를 만나 수륙제를 하고  헤어졌다.


 전란에 나기도 전에 이억기는 예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변아중의 가봉전고는  이 점을 자세하고 적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역원(驛院) 제도와 주막(酒幕)이 있었다. 역원은 초기부터 있었던 공식 숙박 시설이다. 사용자는 공무원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역원 제도를 통해 공무원의 이동을 도왔다.


주막은 사설 기관이다. ‘막(幕)’은 집이 아니다. 주막의 시작은 정식 건물이 아니다. 비바람을 가리려고 천막을 쳤다. 임시, 가설 시설이다. 이곳에서 목을 축일 만큼만 술을 팔았다. 사설, 불법 시설물이다.



 변아중은 이 억기보다 먼저 해남(해진군)으로 달려가야 했다.벽사역은 병조 직할 역참으로 장흥읍 관덕리와 원도리 경계부분에 위치했다.


벽사역 찰방터는 1896년 폐지된 뒤 부동면사무소로 쓰였다. 장흥읍 원도리에 있다. 변아중은 인물이 좋고 공인(公引 : 나라에서 공식으로 발행하는 통행증명서. 문인(文引)이라고도 한다)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얼마든지 말을 빌릴 수 있었다.


벽사도(碧沙道)의 관할역은 아홉 곳으로 파청(波淸)·진원(鎭原)·통로(通路)·낙신(樂新)·영보(永保)·별진(別珍)·녹산(祿山)·양강(陽江)·가신(可申)역이다.  강진 석제원을 거쳐 해남의 남리역까지 이어진다.








[소설]수사 이억기(20) 귀두정 시사



     별미를 준비해 놓고 이억기를 청하는 순천부 시단이 있어 鬼頭亭으로 급하게 채비를 하고 갔다.  양신용을 비롯한 시단의 선비들이 시국을 논하고 풍류가 이어졌다. 귀두정의 주인이자  성황사를 지키고 있는 여월이가 이억기를 불러 내었다.


     "영감 재미는 좀 보았소 좀체 흥이 나지 않는 것 같아 이리 모셨소'

      "눈치는 여전하구먼. 먹구름이 몰려 오니 심사가 좋지 않지"

      " 그 아산사람은 바뻐더이다. 보부상들이 오며가며 소식을 흘리는 데 거북등짝을 만든다고 대장장이들은 모도 그 쪽으로 갔소"

     "보부상들 주리를 틀어보랴. 괜히 수선피우지 말게. 오합지졸이니!"


   양신용이 허리춤을 올리며 영감이 연애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소설] 수사 이억기(19)



  삭풍에 지친 몸을 쉬지도 못하고 동작포로 가서 배를 타고 순천으로 가기로 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은 노비와 수종을 드는 여인과 책사인 변아중도 함께 했다. 포갈국(수안국)에서 온 여인은 이억기가 괴로워하거나 지쳐 보일 때 여흥을 베풀어 기운을 돋았다.

군산포로 오는 선상에서 토사곽란으로  고생을 하다 군산진성에 있는 객관에서 사흘동안 누워있었다. 부령사람 가야지가 군산진의
기녀로 있다가 향리 가까이에 있던 고을사또라 일가친척 오라비를 만난 마냥으로 극진하게 요양을 했다. 변아중을 먼저 순천부로 보내 전임사또가 임지로 속히 떠나도록 단속을 해 두었다.

군산창과 성당창은 군산진 만호가 관리하였다. 이에 군산진은 호남 최대의 조세곡 운반을 관할하는 관청이 되었다. 떠나는 길에 남문인 훈풍루에 올라 첨사와 담소하고 이별했다. 회령포에서 저녁을 지내고 잠시 쉬었는 데 가야지가 통인을 보내 선소에서 귀선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첩보를 알려왔다.

[소설] 수사 이억기(18) 순천부사 도임길


순천부읍성은 전라남도 순천시 매곡동·중앙동·영동 등에 걸쳐 있었던


조선시대 순천부의 읍성이다.


현재 읍성과 관련된 시설은 전혀 남아 있지않지만


세종실록에 1430년 축성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읍성은 둘레 약 1,025m, 높이 약 3.6m


성위에 낮게 쌓은 담이 514개소 높이는 0.9m 였으며


성문 양 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가 6곳


성문이 4개 였다.






낙안읍성은 해안방어시설로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낙안 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 중 하나이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훗날 수사 이억기는 순천부 재임 당시 낙안과 순천부를 오가며 근무했을 것이다.


수사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약칭이다. 정3품 무관으로 임기는 720일이다. 각 도(道)의 바닷가에 위치한 진(鎭)·포(浦)·보(堡)에 소속된 전선(戰船)과 그 각각의 책임자였던 첨절제사(종3품, 약칭 첨사)·우후(정4품)·동첨절제사(종4품, 약침 첨사)·만호(종4품)·권관(종9품) 등을 지휘·통솔했다.

경상·전라·함경도에 각 3인, 경기·충청·평안도에 각 2인, 황해·강원도에 각 1인이 배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상·전라도에 각 2인, 경기·충청도에 각 1인씩 모두 6인이 임명되었고, 나머지 1명씩은 해당 도의 관찰사나 병마절도사가 겸임했다.



 임난 당시 수군을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는 수사는 전라도의 경우, 전라우수사(이억기)와 전라좌수사(이순신), 경상도는 경상우수사(원균)와 경상좌수사(박홍)이 함께 했다.




수사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약칭이다. 정3품 무관으로 임기는 720일이다. 각 도(道)의 바닷가에 위치한 진(鎭)·포(浦)·보(堡)에 소속된 전선(戰船)과 그 각각의 책임자였던 첨절제사(종3품, 약칭 첨사)·우후(정4품)·동첨절제사(종4품, 약침 첨사)·만호(종4품)·권관(종9품) 등을 지휘·통솔했다.

장윤(張潤)순천 사람으로 무과(武科)에 올랐다. 소시적부터 자존심이 강해서 청탁 등으로 벼슬길을 구하지 않았다. 발포 만호(鉢浦萬戶)로 있을 때 수사(水使) 이순신에게 미움을 받자 곧 해직하고 떠났다. 이순신과의 대립은 순천  흥양지역의 약화를 가져 왔다.
이 억기는 이 일을 알고 나서 이순신의 장도가 순탄치 않을 것을 예견하고 수심에 잠겨 약주를 먹고 잠을 자는 일이 사흘에 걸쳤다.  





[소설] 수사 이억기(17) - 출산한 집안에 쌀 10석을 보내다.

온성부(穩城府) 건원동(乾元洞)에 땅이 타서 연기가 나므로 파 보니, 흙과 돌이 그슬렀고 따뜻하였다.


여진의 일파인 오랑합(吾郞哈) 소을지(所乙只)가 와서 말하기를, ‘남눌 우지개(南訥亐知介)가 흑룡강(黑龍江)과 우을미거(于乙未車) 등 여러 종류의 우지개(亐知介)와 서로 연결하여 장차 길을 나누어 경원(慶源)·온성(穩城)·종성(鍾城) 등 3진(鎭)에 들어와서 도적질하려는 계획이 이미 정하여져서, 40여 명을 보내어 수빈강(愁濱江) 등지로 흩어져 때를 엿보고 있다가 이억기의 부장 사공보에게 붙잡히거나 참살당했다.


고을 백성 진강선이 아들 셋을 낳자 쌀 10석과 미역을 보내 기쁜 마음을 전했다.

[소설] 수사 이 억기(16) 경강 판옥선



    삭풍을 맞으며  고을 사또 행세를 하며 백두산의 목재를 수로를 통해  경강(京江)으로 보내 장사하고 조정 내명부에 들였다.

둔전을 만들어 노인들이 농사짓게 하고 남도에서 배를 만들어 경리에 밝았다는 것은 이 억기의 재주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선장(船匠)·목수(木手)는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경강(京江)  에서 선발(選拔)하되, 경기·강원도·충청도의 물가에 거주(居住)하는 사람 1백 명은 여러 고을의 군자미(軍資米)를 사용하여 공급(供給)하고 역사(役使)시키며, 조역군(助役軍) 2백 명은 충청도·강원도당령 선군(當領船軍)   중에서 부근에 거주(居住)하는 사람으로서 방어(防禦)의 긴만(緊慢)에 따라서 추출(抽出)하여 뽑아 배를 만드는 인부로 일하게 했다.


  경강에는 판옥선 15척이 늘 방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지금은 적왜가 다 판옥선을 이용하고 있으니 부득이 판옥선을 사용해야 서로 맞설 수 있으므로 더할 수도 줄일 수도 없는 실정입니다. 다만 《대전》에 기재되지 않은 각처의 판옥선은 민력이 많이 소요되고 폐단 또한 적지 않아서 그 중에 신·구의 것을 분별하고 다시 수효를 줄였는데, 지금 줄인 각처 선척의 수효를 서계하겠습니다.

또한 경강(京江)의 판옥선을 여러 차례 줄여서 지금 15척이 되는데, 수리하고 개조하는 즈음에 그 폐단이 몹시 많으므로 의논하는 이들 중에, 개수할 필요가 없다고 하니, 그 말도 자못 이치가 있기는 합니다



. 그러나 고려조 일을 미루어 본다면, 적변을 예기할 수 없고 또 예비 기구가 이미 설치되어 있는 이상, 경솔히 철수시킬 수 없습니다. 경연관이 아뢴 대로 현존한 15척만 보존해 두는 것이 좋겠다는 보고를 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이억기는 이순신뿐아니라 원균이 통제사로 있던 칠천량해전도 참가한다.

당시 “조정의 명을 어기면 우리 세사람만이 죽으나 명령을 따르면 나라일에 크게 욕된다”고 말하면서 출정을 합니다..이 또한 당시 수군통제사인 원균을 욕하는 것이 아니고 군인으로써 명령에 충실했다.



 

그가 만약 이순신과는 친하고 존경하고 원균은 미워했고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면 원균이 지휘하는 칠전량 해전에 참가하여 패배의 원인을 알면서도 끝까지 맞서 싸웠을까요??

 

이억기는 당시 이순신을 좋아하고 원균을 미워한것이 아니라, 장수로써 조정에 충실했고 , 조선을 위해 싸운것이다.

이순신과원균 모두를 같은 장수로써 인식하고 행동했다는 논리적 결론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소설]수사 이 억기(15)



  동작포에 내린 이흥상이 줄곧 행재소로 내달았다. 이 억기가 보낸 계본의 내용은 이러했다.

 "전라우도 수사(全羅右道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좌수사(左水使) 이순신(李舜臣),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과 협동하여 적선 39척을 쳐부수었습니다. 소금에 절인 수급 9급을 바치나이다"

 주상은 이 억기가 노획한  회갑(盔甲:투구와 갑옷)과 왜구의  물건을 자랑하며 중국 장수에게 가져다가 보여주었다.

이 억기는 측근들의 안위를 보살피고 보직을 주는 것을 늘 염두에 두었다.  우수영에서 뱃길로  행재소 올라간 이흥상은 호위청 장사
벼슬을 받고, 이 근석은 선전관이 되었다.

 이 억기는 이처럼 측근들을  편안하게 돌보아 주어   그 너그러운  인품을 노래하고 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설]수사 이억기(14) 말잡이 거덜





 사복시에서 수많은 거덜의 행패를 목도하기도 했던 이 억기는 여진과 조선이 서로 주고 받는 것이 한 둘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말을 끄는 하인을 ‘거덜’이라고 했고, 이를 한자로는 ‘구종驅從’ 혹은 ‘구종배驅從陪’라고 했다.  사복시司僕寺에서 말 관리를 담당하던 종7품의 잡직 종사자들도 거덜이라고 했는데, 이들의 정식 관칭은 견마배牽馬陪였다.


이들 거덜들은 평소에 말을 관리하다가 궁중의 귀인이나 상전이 말을 타고 행차할 때면 말고삐를 잡고 행차의 앞에서 ‘물렀거라’를 외치며 위세를 부렸다.


때로는 이들이 공무에 개입하여 농간을 부리기도 했다. 한국어의 말馬에 대한 다양한 용어들이 고려 말기에 몽고에서 수입되었듯이, ‘거덜’이란 용어도 고려 말기에 몽고에서 들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몽고어에서 말을 끄는 사람을 ‘쿠투치’라고 한다. ‘쿠투치’의 ‘쿠투’는 ‘말을 끌다’는 의미이고 이 어휘가 조선어 ‘거덜’의 연원으로 생각된다. 거덜먹거리다는 염치없이 나대는 것을 의미한다.  원님덕에 나발부는 격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소설] 수사 이억기(13)


 오랑캐와 맞서고 있는 사람들이 나라의 동량인 것이다. 경흥부에는 이경록이, 경원부에는 이억복이,  온성부에는 이억기가 있었다.

경흥 조산보에는 여해 이순신이만호겸  녹둔도 전사로 자리잡고 있었다. 늦은 가을철 추수하느라 경계에  방심하고 있는 사이 배고픈 여진족들이 들이닥쳐 경원부를 내습했다.   

경원부사 이억복이 여진족들의  공격으로 전사하고 말았다. 우애가 좋던 이억기 형제는 이억기가 경원부를 떠나자 형인 이억복이 부임을 한 것인데 억기는 자신을 대신해서 형이 죽은 것같아 애통하기 그지 없었다. 

[소설]수사 이억기(12)



  삭풍에 몸살이 나기 여러 번이다. 모로비가 끓여 온 개장국, 구적으로 하단전을 보하고서야 털고 일어났다.

누런 개를 잡아 청장, 참기름과 함께 작은 항아리에 넣어 무르도록 중탕하는 찜, 개의 창자에 여러 재료를 넣고 찐 순대, 삶은 개고기를 양념하여 꼬챙이에 꿰어 굽는 개장꼬치 등 다양한 조리법이 있다.


 개고기는 성(性)이 온(溫)하고 미(味)는 산(酸)하고 무독(無毒)하다.오장(五臟)을 편안하게 하고 혈맥을 조절하고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여 기력을 증진시킨다. 또한 양기를 도와서 양물(陽物)을 강하게 한다.


 


[소설]수사 이억기(11)

여진족이 변방을 침략하여 경흥부 조산보(造山堡)를 점령했다. 종친인 이경록이 부사로 있는 곳이라 방관하기도 머뜩했다.

이억기는 자신이 조련한 천마군 500명으로 조산보에서 피체된 포로 300명을 잔인하게 도륙하고 조정에 장계를 보내 이를 알렸다.


* 저술문의: palbeke6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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